심리칼럼

성태훈의 아빠심리학 6 - 등교거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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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우상담센터 작성일17-04-04 13:45 조회1,3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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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가는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이어서 해보려고 한다. 학교를 안가는 것이 학교에 가서 느끼는 고통감이 크기 때문에 라고 치자. 그럼 왜 고통스러운지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아빠가, 엄마가 뭐라도 해줄 것 아닌가? 도대체 왜 말도 못하나? 여전히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학교거부는 사실 별다른 행동상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일어나지만,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확실히 극단적인 행동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있거나, 강도 높은 고통감을 느껴야 한다. 대부분은 고통감을 못이겨 학교를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한 극단적 행동을 한다는 것은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혼자서만 고민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별로 표현해본 적이 없다는 아이다’, ‘초등학교때는 참 순하고 착했다’ 등의 표현을 달리 해보면 아이가 내성적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뿐, 결과적으로 ‘순하고 착했다’라는 표현은 아이의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심리적인 건강을 생각하면 ‘착한 것’은 오히려 짐이 될 때가 많다. 마음이 편하고 싶다면 ‘솔직함’이 더 중요한 기준이다. ‘착하다’라는 것은 ‘부모 말을 잘 들었다’의 다른 말이다. 그럼 한번 바꿔서 생각해보자. 아이가 볼 때 나는 ‘착한 아빠’인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착한 아빠, 착한 엄마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주어진 것만 하려한다. 학업이나 또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 해야 할 게 많아지는 청소년기가 두려운 시기일 수 있다. 
그러나, 소통없이 일방적으로 인정받은 아이들은 어쨌든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에 자존심이 세다. 그 나이에 맞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다면, 심리적으로는 ‘미운 다섯 살’ 정도가 더 적합한 용어일 수 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곱셈을 하겠다고 덤비면서 안되면 화를 내고, 심지어는 아이의 요구대로 문제를 내 준 부모를 비난한다. 물론 우리 아이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다섯 살과 똑같지 않다. 청소년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학교를 가야한다는 것은 알지만, 갈 수 없는 자신의 모순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어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을 뿐이다. 아빠들도 생각해보자.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아빠는 직업적 자부심이 강하다. 그런데,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아내가 요구할 때는 말문이 막힌다. ‘책임감이 강하다’라는 자기진술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를 안가는 아이는 심리적으로 다섯 살 아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의 요구대로 해주는 것이다. 학교 가기를 완강히 거부한다면, 부모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이 편하도록 보내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다. 이전과 다르게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착한 아이를 요구하기 보다는 착한 아빠가 되어야한다. 부모가 아이의 속마음을 인정하고 알아줄 때, 아이는 세상에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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